카탈루냐 공화좌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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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은 카탈루냐의 독립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1931년 창당 이후 카탈루냐 민족주의, 좌익 민족주의, 공화주의, 지역주의를 표방하며 중도좌파에서 좌익 정치 노선을 걷고 있다. 스페인 내전 중에는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민주화 이후 재건되어 카탈루냐 자치 정부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현재는 카탈루냐 의회와 스페인 의회, 유럽 의회에서 의석을 보유하고 있으며,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카탈루냐 독립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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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루냐 공화좌파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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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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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Esquerra Republicana de Catalunya (카탈루냐어) |
약칭 | ERC |
창립 | 1931년 3월 19일 |
본부 | 스페인 카탈루냐 바르셀로나 (C/Calàbria, 166, 08015) |
색상 | 오렌지색 |
웹사이트 | http://www.esquerra.cat/ www.esquerra.cat |
지도자 | |
대표 | 오리올 쥰케라스 |
사무총장 | 엘리센다 알라마니 |
주 의원단 대표 | 안나 시모 이 카스테요 |
이념 | |
주요 이념 | 카탈루냐 독립 생태 민족주의 좌익 민족주의 공화주의 민주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지역주의 계파: 연방주의 |
정치적 위치 | |
스펙트럼 | 중도좌파 ~ 좌익 |
조직 | |
청년 조직 | 카탈루냐 공화주의 청년 |
회원수 | 9,047 (2022년) |
참여 정당 | |
국내 | 좌파 전선 (1936–1939) 인민의 유럽을 위한 연합 (1987–1989) 인민의 유럽을 위하여 (1989–1994) 인민의 유럽을 위하여 (1994–1999) CN-EP (1999–2004) 인민의 유럽 (2004–2009) EdP-V (2009–2014) EPDD (2014–2019) 아오라 레푸블리카스 (2019년부터) 독립을 위한 좌파 (2023년부터) |
유럽 | 유럽 자유 동맹 |
유럽 의회 | 녹색당-유럽 자유 동맹 |
합병 | |
의석수 | |
하원 (카탈루냐 의석) | 7/47 |
상원 (카탈루냐 의석) | 4/24 |
카탈루냐 주의회 | 20/135 |
발레아레스 제도 의회 | 0/59 |
카탈루냐 시장 | 329/947 |
카탈루냐 시의원 | 2898/9077 |
발레아레스 제도 시의원 | 16/925 |
관련 정보 | |
과거 선거 연합 | 준츠 펠 시 |
신문 | La Humanitat |
관련 인물 | 프란세스크 마시아 이 류사 주세프 타라데야스 이 주안 |
2. 역사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은 1931년 3월 19일 바르셀로나 산츠에서 프란세스크 마시아의 카탈란 자치국, 루이스 콤파니스의 카탈루냐 공화당, 호안 류이 이 발레스카의 ''L'Opinió'' 그룹이 연합하여 창당되었다.[6] 1931년 4월 시의회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6] ERC는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고, 프란세스크 마시아는 스페인 공화국 내 카탈루냐 자치 정부 수반이 되었다.[7]
1932년 카탈루냐 지방 선거에서 ERC는 카탈루냐 사회주의 연합 등과 연합하여 다수 의석을 확보, 카탈루냐 자치 조약으로 카탈루냐 의회 입법 권한을 얻었다.[8] ERC는 소작농 보호를 위한 작물 계약법 제정을 추진했으나, 지역 연맹 반대와 스페인 정부와의 갈등을 겪었다. 1933년 호안 류이 등은 ERC를 떠나 국민주의 공화 좌파당을 창당했다.
1933년 프란세스크 마시아 사후 루이스 콤파니스가 자치 정부 수반이 되었으나, 1934년 스페인 자치 우익 연합(CEDA)의 우익 장관 입각 후 카탈루냐 자치국을 선언했다가 체포되었다.[9] 1936년 스페인 내전 발발과 함께 ERC는 인민 전선에 참여, 카탈루냐에서 큰 지지를 얻었다.[10] 에스타트 카탈라는 분리, 국민주의 공화 좌파당은 재합류했다. 내전 중 ERC는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카탈루냐 통일 사회당(PSUC), 무정부주의 노동조합 CNT와 갈등하며 전선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1]
1939년 프란시스코 프랑코 집권 후 ERC는 불법화, 루이스 콤파니스는 처형되었다.[1] ERC는 지하에서 반파시스트 저항을 조직, 1945년 호세프 타라델라스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1]
프란시스코 프랑코 사후, ERC는 1977년 카탈루냐 좌익–민주 선거 전선 연합으로 의회에 진출,[13] 호셉 타라델라스 귀환과 헤네랄리타트 복원 후 1980년 1980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14석을 얻었다.[14] 그러나 1984년 1984년 카탈루냐 자치주 의회 선거에서 5석으로 쇠퇴했다.
1987년 이후 아르헨 콜롬 등 젊은 독립주의자 참여로 ERC는 활력을 찾았고, 1989년 카탈루냐 독립을 목표로 삼았다. 테라 리우레 일부도 ERC에 합류했다.
1992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ERC는 11석을 획득, 제3당이 되었다. 1993년 좌익 민족주의자 회원들이 합류했고,[15] 1995년 지방 선거에서 550명 이상 의원과 32명 시장을 배출, 1995년 카탈루냐 선거에서 13석을 얻었다.
1996년 아르헨 콜롬은 필라르 라홀라와 ERC를 떠나 독립당을 창당했으나 곧 해산되었다.[16] 1996년 호세프 루이스 카로드 로비라가 대표, 조안 푸이그세르코스가 사무총장이 되었다.
2003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ERC는 23석을 얻어 카탈루냐 사회주의자당, ICV-EUiA와 연립 정부("트리파르티트")를 구성,[62] 파스쿠알 마라갈 정부에서 총리 포함 6개 부처를 맡았다.[62] 그러나 2006년 카탈루냐 자치 규약 개정에 반대, 정부 위기로 조기 선거가 치러졌다.
2. 1. 카탈루냐 공화국과 제1차 카탈루냐 자치 정부 (1931–1936)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몰락(1930년) 이후, 카탈루냐 좌파는 좌익 독립 지도자 프란세스크 마시아의 지도 아래 연합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탈루냐 공화좌파는 1931년 3월 19일 바르셀로나 산츠에서 열린 카탈루냐 좌파 회의에서 프란세스크 마시아가 이끌던 독립주의 단체 카탈란 자치국, 루이스 콤파니스가 이끌던 카탈루냐 공화당, 호안 류이 이 발레스카의 ''L'Opinió'' 그룹이 연합하여 창당되었다.[6] 이 정당은 1931년 4월 12일에 치러진 시의회 선거에서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6] 이틀 뒤인 4월 14일, 마드리드에서 스페인 공화국이 선포되기 몇 시간 전에 마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이베리아 연방 내의 카탈루냐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산 세바스티안 협약에서 합의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흘 뒤 그들은 마시아가 최근에 창설된 스페인 공화국 내의 자치 카탈루냐 정부인 카탈루냐 자치 정부 수반이 되도록 마드리드 정부와 협상했다.[7]1932년 9월, 스페인 공화국 코르테스는 카탈루냐 자치 조약을 승인했는데, 이 조항에는 카탈루냐 의회에 완전한 입법 권한을 부여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었으며, 1932년 11월 20일에 의회가 선출되었다. 카탈루냐 공화좌파는 카탈루냐 사회주의 연합 및 기타 소규모 좌익 정당과 연합하여 대다수의 의석(85석 중 67석)을 확보한 반면, 이전에 카탈루냐 민족주의의 더 보수적인 견해를 대표했던 헤게모니 정당인 지역 연맹은 2위를 차지했지만 ERC에 훨씬 뒤쳐졌다(85석 중 17석).[8] ERC는 이러한 강력한 입지를 바탕으로 대중 계급과 부르주아 소시민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고자 문화, 건강, 교육 및 민법 분야에서 법률을 승인했다. 또한 소작농을 보호하고 경작하고 있는 토지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는 작물 계약법과 같은 법률도 승인했지만, 이는 지역 연맹에 의해 반대되었고 스페인 정부와의 법적 분쟁을 유발했다. 1933년 10월, 호안 류이와 l'Opinió 그룹의 다른 구성원, 호셉 타라델라스를 포함하여, 카탈루냐 집행 위원회와 자치 정부 수반 간의 권력 분배에 대해 마시아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ERC를 떠나 국민주의 공화 좌파당 (PNRE)을 창당했다.
1933년 12월 프란세스크 마시아가 사망한 후 카탈루냐 의회에서 새로운 자치 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루이스 콤파니스는 1934년 10월 6일, 스페인 자치 우익 연합 (CEDA)의 우익 장관들이 스페인 공화국 정부에 입각한 후, 불법적으로 ''스페인 연방 공화국'' 내의 카탈루냐 자치국을 선언했다. CEDA는 파시즘과 가깝다고 여겨졌고, 따라서 자율성을 억압하고 스페인에서 완전한 권력을 장악하는 첫 단계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 선언은 스페인 군대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고, 카탈루냐 정부는 체포되었다.[9] 콤파니스를 포함한 정당 지도자들과 카탈루냐 정부는 공화국 최고 법원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고 투옥되었으며, 자치 조약은 1936년 2월까지 중단되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의 시작과 함께, ERC는 그 해 선거에서 인민 전선의 일부가 되었다. 에스케라는 카탈루냐에서 인민 전선(카탈루냐어로 ''Front d'Esquerres'', "좌익 전선")의 선두 세력이 되었으며, 카탈루냐 의석 54석 중 41석을 차지했고, 그 중 21석은 ERC에 속했다.[10] 새로운 좌익 스페인 정부는 콤파니스와 카탈루냐 정부 구성원들을 사면하고 자치를 회복했다. 6월에 에스타트 카탈라는 ERC에서 분리되었고, PNRE는 다시 합류했다.
2. 2. 내전, 프랑코 독재와 지하 활동 (1936–1976)
스페인 내전 동안,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주요 세력이었던 ERC는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과 친소련 카탈루냐 통일 사회당(PSUC)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전선의 단결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동시에, 무정부주의 노동 조합 CNT와 그들의 민병대에 의해 사실상 통제되고 있는 상황을 수습하고 카탈루냐에서 전쟁 노력을 조직하려 시도했다. 루이스 콤파니스 대통령은 다른 공화국 세력, 특히 무정부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포함하는 연립 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호세프 타라델라스를 '카탈루냐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당은 5월 사건 이후 공화국 정부에 의해 카탈루냐가 완전히 통제되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1]1939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권력을 잡은 후, ERC는 (다른 모든 '인민 전선' 참여자들과 함께) 불법화되었다. 카탈루냐 헤네랄리타트의 전 대통령인 루이스 콤파니스는 나치 독일 요원들에 의해 비시 프랑스와 협력하여 체포되었고, 스페인으로 송환되어 1940년 10월 15일 바르셀로나 몬주익 성에서 처형되었다.[1]
1939년부터, 프랑코의 카탈루냐 점령 이후 당이 거의 해체될 정도로 취약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ERC는 지하로 들어가 마누엘 훌리아츠와 자우메 세라를 중심으로 반파시스트 저항을 조직하려 노력했다. 1945년, 많은 ERC 구성원이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툴루즈에서 열린 ERC 회의에서 전 장관 호세프 타라델라스를 사무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1954년 호세프 이르라를 대신하여 망명 중인 카탈루냐 자치 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이 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ERC의 사무총장직은 호안 사우레트에게 넘어갔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연합군의 개입으로 프랑코 독재 정권을 전복할 가능성이 보이자, 망명 중인 ERC 지도부는 페레 푸이그와 호안 로드리게스-파파세이트를 카탈루냐로 보냈다. 그 당시 ERC는 카탈루냐 민주주의 협의회와 민주 세력 협의회에 참여했다. 1952년, 에리베르트 바레라는 내부로 돌아와 사실상 당을 지도하게 되었다. 1964년 9월 11일 카탈루냐의 날, ERC와 다른 단체들은 전쟁 이후 최초의 반프랑코 시위를 조직했다. ERC는 독재 정권에 맞서는 모든 이니셔티브에 잇따라 참여했다.[1]
2. 3. 민주화 이행과 쇠퇴기 (1976–1987)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 사망(1975년) 이후,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은 1976년 7월 제8차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바레라를 대표로 재확인했다. 1977년 제헌 의회 선거에서 ERC는 공화당으로서의 지위 때문에 아직 합법화되지 않아 스페인 노동당과 동맹을 맺고 카탈루냐 좌익–민주 선거 전선이라는 연합으로 참여하여 한 석(바레라)을 획득했다.[13]
1977년 10월, 호셉 타라델라스 대통령(1931년 당 창립자)이 카탈루냐로 돌아와 헤네랄리타트가 복원되었다. 새 헌장 초안이 작성되었는데, ERC는 최소한의 자치를 보장하지 않는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1979년 승인 국민 투표에서 ERC는 자치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찬성했다. 1980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ERC는 14석을 얻어 바레라를 카탈루냐 의회 의장으로 선출했다. 바레라는 조르디 푸졸(Convergència i Unió)에게 헤네랄리타트 의장 투표를 하도록 결정했다.[14] 그러나 1984년 1984년 카탈루냐 자치주 의회 선거에서 ERC는 5석만을 얻었고, Convergència i Unió(CiU)의 헤게모니에 가려져 잠시 쇠퇴기를 맞이했다. 1986년 1986년 스페인 총선에서 스페인 의회 의석을 잃었다.
1987년 유럽 의회 선거 (스페인)에서 ERC는 에우스코 알칼타스나(EA)와 갈리시아 민족주의당(PNG)과 함께 여러 민족의 유럽을 위한 연합을 결성하여 카탈루냐 내에서 약간의 지지(112,107표, 득표율 3.7%)를 얻었다.
1988년 카탈루냐 자치주 의회 선거에서는 득표수 111,647표로 1986년 총선보다는 나았지만, 1984년 주 의회 선거와 1987년 유럽 의회 선거보다는 저조하여 당의 위기 상황이 지속됨을 확인했다. 카탈루냐 유권자의 4% 지지를 받았지만, 선거 방식 때문에 의석수는 이전보다 1석 늘어난 6석으로 주 의회 제5당 세력을 유지했다.
후안 우르타라가 이끈 ERC는 1989년 스페인 총선에서도 주 내 득표율 2.6%, 득표수 84,756표로 1986년과 거의 같은 결과에 그쳐, 1984년 주 의회 선거에서 잃은 의석을 회복하지 못했다.
2. 4. 회복 (1986–1996)
1987년, 아르헨 콜롬과 호세프 루이스 카로드 로비라 같은 인물들이 서명한 국민 호소문이 발표되었는데, 이들은 스페인 과도기에 대한 환멸로 나타난 새로운 세대의 독립주의자들을 ERC가 결집시키기를 원했다. 이 젊은이들의 참여는 당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988년 카탈루냐 선거에서 6석을 얻었다. 1989년, 아르헨 콜롬이 이끄는 새로운 지도부가 카탈루냐의 독립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 이러한 새로운 방향성의 결과로 1990년, 1940년 망명 중에 창설된 역사적인 조직인 카탈루냐 국민 전선이 ERC에 합류했다. 1991년, 조직 테라 리우레는 전략을 재고하여 무장 투쟁을 포기했고, 그 구성원 중 일부는 ERC에 합류했으며, 카탈루냐 리우레를 형성했던 많은 사람들도 합류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ERC를 사실상 좌익 카탈루냐 독립주의의 대표로 만들었다.1992년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얻은 결과는 ERC를 21만 명 이상의 유권자들의 지지와 11석 획득으로 카탈루냐의 세 번째 정치 세력으로 만들었다. 이는 독립 지지 정당으로 등장한 정당이 처음으로 널리 인기를 얻은 캠페인 이후였다. 1992년 6월에 열린 ERC의 제18차 전국 대회는 선거 성장, 당원 활동 및 지역 존재에 직면하여 규약 개정을 승인했다. ERC는 첫 번째 규약 조항에서 카탈루냐 국가의 영토 통일과 독립을 옹호하며, 유럽 틀 내에서 자체 국가를 건설하고 민주주의와 환경, 인권 및 국민의 권리 옹호를 취하는 좌익의 이념적 입장과 함께 사회 발전과 연대에 기반한 이념과 정치적 행동을 펼친다.
1993년 스페인 총선에서 ERC는 하원 진출을 회복했다. 같은 해, 호르디 카르보넬과 아벨리 아르티스 이 제네르 "티스네르", 좌익 민족주의자 회원들이 ERC에 합류했다.[15] 1995년 5월 28일 지방 선거는 당의 제도적 존재의 중요한 양적, 질적 도약을 나타냈다. ERC는 카탈루냐의 많은 지방 의회에서 진출을 회복하여 550명 이상의 선출된 의원과 32명의 시장을 배출했으며, 그리하여 세 번째 지방 정치 세력이 되었다. 1995년 카탈루냐 선거에서 ERC는 공화국 시대 이후 가장 많은 득표수인 30만 5천 표 이상과 13석을 얻었다.
1996년, 심각한 내부 위기 이후, 아르헨 콜롬은 필라르 라홀라와 함께 당을 떠나 독립당을 창당했다.[16] 그러나 이 당은 짧은 생명을 가졌다. 1999년 지방 선거에서 저조한 결과를 얻었고, 바르셀로나 대표로 나선 필라르 라홀라는 의석을 얻지 못했다. 그 후, 당은 해산되었다.
2. 5. 카로드 로비라 시대와 정부 복귀
1996년 11월, ERC의 제21차 전국 대회가 열렸다. 당원들은 호세프 루이스 카로드 로비라를 새로운 대표로, 조안 푸이그세르코스를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전략에 몇 가지 변화를 발표했다. 카탈루냐 독립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그 아이디어를 유일한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당을 카탈루냐 좌파의 새로운 대표로 자리매김하려 했다.[62]2003년 11월 16일 카탈루냐 의회 선거에서 ERC는 23석을 얻어 정부 구성을 결정하는 "핵심 정당"이 되었다. 다른 정당들이 과반수를 얻기 위해서는 ERC와 합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몇 주 동안 CiU(중도 우파 민족주의 정당)와 합의할 것으로 보였지만, 결국 카탈루냐 사회주의자당 및 생태 사회주의 연합 ICV-EUiA와 "진보적 협약"(티넬 협약 또는 일반적으로 "트리파르티트"라고 함)을 선택했다.[62]
ERC는 파스쿠알 마라갈이 의장을 맡은 제네랄리타트의 삼자 정부 일원이 되었으며, 카로드 로비라가 "Conseller en Cap"(총리)을 포함하여 6개의 정부 부서를 맡았다. ERC가 맡은 다른 5개 부처는 호세프 바르갈로의 교육부, 안나 시모의 복지 및 가족부, 페레 에스테베의 상업, 관광 및 소비부, 조안 카레테로의 정부 및 공공 행정부, 카를레스 솔라의 대학, 연구 및 정보 사회부였다. 또한, ERC 지도자 에르네스트 베나크가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62]
개정을 위한 주요 세력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은 결국 카탈루냐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카탈루냐 자치 규약의 2006년 변경에 반대했다. 카탈루냐 자치를 충분히 늘리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 인해 파트너(특히 PSC)와의 정부 위기가 발생하여 2006년 조기 선거가 치러졌다.
3. 이념
카탈루냐 공화좌파당은 과거에는 사회민주주의로, 최근에는 민주사회주의로 묘사되어 왔다.[17][18][19] 카탈루냐 독립을 강력하게 지지하며,[20] 지역주의,[20] 카탈루냐 민족주의,[21][22] 생태 민족주의,[23] 좌익 민족주의를 표방한다.[24][25] 또한 공화주의[26][27]와 지역주의를 옹호하며,[20] 연방주의 파벌을 가지고 있다.[28][29][30] 이는 본질적으로 포괄정당이며, 일반적으로 중도좌파[31][32][33][34]에서 좌익 정치로 분류된다.[35][36][37]
1993년 제19차 전국 회의에서 승인된 이념 선언에는 좌파(에스케라), 공화(레푸블리카), 카탈루냐(카탈루냐)의 세 가지 기본 정치 원칙이 정의되어 있다.[38]
현재 좌익(좌파)을 표방하고 있지만,[58] 역사적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좌익 정당의 변두리,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에 위치했다.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카탈루냐 독립ca를 지지하며, 폭력을 부정하고 정치 제도를 통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민족 자결을 목표로 한다. 테러리스트 그룹 테라 리우라ca의 해산에 기여했으며, 이 그룹의 일부 멤버를 ERC에 성공적으로 영입했다.[59]
4. 정치 원칙 및 대표성
ERC는 현재 좌익(좌파)을 표방하고 있지만[58], 역사적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좌익 정당의 변두리, 사회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정당 위치에 있었다.
평화적인 수단을 통한 카탈루냐 독립ca을 지지한다. 폭력을 부정하고, 정치 제도를 통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민족 자결을 목표로 한다. 테러리스트 그룹 테라 리우라ca의 해산에 기여했으며, 이 그룹의 일부 멤버를 ERC 내로 성공적으로 영입했다.[59]
5. 내부 조직
카탈루냐 공화좌파당(ERC)의 내부 조직은 카탈루냐 자치구 내에 9개의 지부, 자치구 외에 3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60]
카탈루냐 자치구 내 지부 조직(federacions regiona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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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구 외 카탈루냐어권 지부 조직(federacions territorial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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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재 당선 의원 및 단체장
기관 | 의석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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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의회 | 1석 (2009년-) |
스페인 국회 (하원) | 3석 |
카탈루냐 자치 의회 | 21석 (2012년-) |
자치단체장 | 150명 (2011년-) |
자치단체 의원 | 1,410석 (2011년-) |
카탈루냐 | 1,384석 |
발레아레스 제도 | 16석 |
발렌시아 | 10석 |
7. 역대 지도자
(출생–사망)
(재임 기간)






